원전 산업의 밸류체인: 발전소 하나를 둘러싼 기업들의 역할
원자력발전소는 하나의 기업이 만드는 제품이 아니다.
하나의 원전 프로젝트에는 발전소 설계, 주요 기자재 제작, 건설, 각종 계측·제어 시스템, 보조설비, 시운전, 운영과 유지보수 등 여러 분야가 연결된다.
따라서 원전 산업을 투자 관점에서 이해하려면 단순히 '원전 관련주'라는 분류보다 밸류체인(value chain)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번 글에서는 특정 종목의 투자 판단보다는 원전 프로젝트를 구성하는 주요 산업 영역을 살펴본다.
1. 발주와 프로젝트 개발
대규모 원전 프로젝트는 먼저 사업을 추진할 주체와 프로젝트가 정해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발전사업자나 관련 기관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발전소의 규모와 기술 방식, 사업 구조 등을 결정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프로젝트 전체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후 설계와 기자재, 건설업체의 참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주식시장에서는 이 단계의 뉴스가 상당히 크게 보도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프로젝트 전체 규모와 개별 공급기업의 사업 규모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2. 설계와 엔지니어링
원전 프로젝트에서 설계와 엔지니어링은 핵심적인 초기 단계다.
발전소의 전체적인 구조뿐 아니라 각종 설비와 시스템을 어떻게 구성할지 기술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한국의 원전 산업을 살펴보면 한국전력기술과 같은 기업이 이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
이 단계의 특징은 제조나 건설과는 사업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다.
즉 '원전 관련 기업'이라는 하나의 분류 안에서도 설계 기업과 제조기업은 서로 다른 비즈니스 모델을 갖는다.
3. 주요 기자재 제조
원전 건설에는 다양한 기자재가 필요하다.
특히 원자로와 발전소의 핵심 설비 가운데 일부는 높은 수준의 기술력과 품질관리가 요구된다.
국내에서는 두산에너빌리티가 원전 주요 기자재 제조 분야에서 중요한 기업으로 거론된다.
다만 기업을 분석할 때는 '원전 기자재 기업'이라는 한 문장으로 사업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두산에너빌리티의 경우 원전 외에도 가스터빈과 복합화력 등 발전설비 사업을 함께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일한 원전 산업에 참여하더라도 기업마다 전체 사업 포트폴리오가 다를 수 있다.
4. 건설과 시공
원전 프로젝트는 설계와 기자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실제 발전소를 건설하고 각종 설비를 설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건설기업은 프로젝트의 현장 시공과 관련된 역할을 수행한다.
원전 건설은 일반적인 건축이나 토목 프로젝트와 달리 원자력 분야의 안전 기준과 기술적 요구사항을 충족해야 하기 때문에 관련 경험과 기술력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따라서 원전 밸류체인을 살펴볼 때 건설기업 역시 별도의 영역으로 볼 필요가 있다.
5. 계측·제어와 보조설비
원자력발전소의 핵심은 거대한 원자로만이 아니다.
발전소를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각종 상태를 측정하고 설비를 제어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계측·제어 시스템은 발전소의 다양한 정보를 확인하고 필요한 제어 기능을 수행하는 데 사용된다.
또한 발전소에는 원자로 자체뿐 아니라 수많은 보조설비와 주변 시스템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원전 공급망에는 대형 기업뿐 아니라 특정 부품이나 시스템에 전문성을 가진 기업들도 참여할 수 있다.
투자자가 원전 밸류체인을 공부할 때 놓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이런 세부 공급망이다.
6. 시운전과 운영
발전소 건설이 완료됐다고 곧바로 상업운전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각종 설비와 시스템을 점검하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후 발전소가 실제로 운영되기 시작하면 안정적인 운전과 관리가 중요해진다.
원전 산업을 장기간의 산업 사이클로 바라보면 건설 단계뿐 아니라 운영 단계도 중요한 영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7. 유지보수와 정비
원전은 장기간 운영되는 발전설비다.
따라서 발전소가 가동되는 동안에도 정기적인 점검과 유지보수가 필요하다.
이 부분에서 한전KPS와 같은 발전설비 정비 관련 기업이 원전 밸류체인과 연결된다.
이 영역은 신규 원전 건설과는 사업의 성격이 다르다.
즉 원전 신규 건설이 활발하지 않은 시기에도 기존 발전소의 운영과 정비라는 별도의 시장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의미다.
8. SMR이 등장하면서 달라지는 공급망
최근 원전 산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분야 중 하나가 SMR이다.
SMR은 소형모듈원자로를 의미한다.
기존 대형 원전과 다른 방식으로 설계·제작·건설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상용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면 원전 공급망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
특히 모듈화와 제작 방식, 주요 기자재의 생산 방식 등에서 기존 대형 원전과 다른 산업 구조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
국내 기업들도 해외 SMR 개발사와의 협력이나 기자재 공급 등을 통해 이 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다만 SMR은 아직 모든 프로젝트가 상업적으로 확립된 단계는 아니기 때문에 실제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과 계약, 인허가, 제작 및 건설 여부를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원전 밸류체인을 알면 '원전 관련주'라는 말이 달라진다
원전 산업을 크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프로젝트 개발·발주
↓
설계·엔지니어링
↓
주요 기자재
↓
건설·시공
↓
계측·제어·보조설비
↓
시운전·운영
↓
유지보수·정비
실제 프로젝트는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각 단계가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투자자가 산업의 큰 구조를 이해하는 데는 유용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전 관련주라고 해서 모두 같은 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기업은 설계에 강점이 있고, 어떤 기업은 주요 기자재를 만들며, 어떤 기업은 건설이나 유지보수에 참여한다.
따라서 원전 관련 뉴스를 볼 때도 단순히 '원전 수혜주'라는 표현만 보는 것보다 해당 프로젝트에서 어떤 기업이 어떤 역할을 맡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산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산업을 먼저 보면 기업이 보인다
주식 투자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종목부터 찾았다.
하지만 산업을 공부할수록 순서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산업의 구조를 보고,
그 안에서 밸류체인을 확인하고,
각 기업의 역할을 살펴본 다음,
마지막으로 기업의 실적과 재무상태를 보는 것이다.
원전 산업도 마찬가지다.
'원전이 좋아질 것인가'라는 질문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원전이라는 거대한 산업 안에서 어떤 기업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이번에 원전 밸류체인을 정리하면서 나 역시 원전 관련주를 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졌다.
앞으로 원전 관련 기업을 공부할 때는 주가부터 보기보다 먼저 그 기업이 이 복잡한 밸류체인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부터 확인해보려고 한다.
※ 이 글은 개인적인 산업 및 투자 공부를 위한 정보 정리이며 특정 종목의 매수·매도를 권유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과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